며칠전 늦은 오후 템즈강변을 거닐고 있었다. 강변의 가로수들은 푸른빛을 띄는 수천개의 전구들에 휘감긴채 런던의 저녁을 맞이 하고 있었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겨 다다른 런던아이, 오랜시간 잊고 지내왔던 기억이다.


내 가장 아름다웠던 스무살, 그 찬란했던 나날을 채워주던 그녀를 나는 사랑했다. 여느 연인처럼 기약없는 결혼 약속에 설레하고, 몇명의 아이를 낳을지, 이름은 외자로 할지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에 행복해했다. 긴 생머리에 큰 눈망울이 잘어울리던 그녀다. 나는 종종 어머니께 그녀를 자랑하곤 하였는데 어머니는 그녀를 사슴같다고 하였다. 


첫 캐나다 여행에서 우리는 수일의 밤을 함께 지세웠다. 보스턴을 거쳐 토론토로 향하는 그레이하운드 버스에 갖혀있던 수시간을, 폭설에 얼어버린 몬트리올의 길거리를 하이힐을 신은채 힘겹게 걷던 그녀의 귀엽던 모습을 나는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한다. 

한번은 함께했던 뉴욕여행에서는 길거리 한복판에서 크게 싸웠었는데, 나는 너무 화가난 나머지 그녀를 홀로둔 채 숙소로 돌아와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불안한 마음에 싸웠던 자리로 돌아가니, 그녀는 펑펑울며 같은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몇번이나 꼭 안아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수년을 웃고 싸우며 만났다. 그리고 여느 연인처럼 별볼일 없는 이유로 헤어졌다. 


헤어진후 2년이 지날 무렵, 나는 좋은 기회로 유럽배낭 여행을 떠나게되었다. 런던 열흘, 파리 열흘의 일정이었다. 런던일정의 마무리하려던, 크리스마스의 늦은 오후, 나는 템즈강변을 거닐고 있었다. 그날의 템즈강 거리 또한 지금처럼 푸른빛에 물들어있었다. 테이트모던에서 출발하여 정처없이 이곳저곳을 발걸음이 닿는대로 옮기다보니 어느새 런던아이 앞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다 마주쳤던 눈에 너무나 익숙한, 큰 눈에 긴 생머리의 모습, 잘지냈냐는 인사가 무색해질 만큼 여전했던 그녀였다. 우연히도 그녀 또한 여행 중 이었다고 한다. 마침 일정이 비슷했던 우리는 파리까지 동행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동안 연애는 했는지 시간은 지났어도 나누던 대화는 여전히 시시콜콜했다. 그렇게 함께 런던과 파리의 거리들을 걷고 밤을 지세우며 서로를 그리워하며 지냈던 시간을 채워나갔다. 그렇게 우리는 재회했다 그리고 귀국 후 얼마지나지 않아 우리는 또다시 별볼일 없는 이유로 헤어졌다. 


헤어진 후에도, 가끔 그녀가 그리웠지만 그런 감정은 시간에 따라 무디어졌다. 다만, 다른사람을 만나며 나누던 대화에 그녀가 묻어나오곤 할때면 웬지모를 감정이 몰려와 가슴 한켠이 미워지곤했다. 다시 한번 이별을하고 수년이 지나 얼마전 그녀에게 안부인사를 남겼다. 혹시나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에 남긴 인사였지만  무엇도 바라려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온 짧은대답, "나 다음주에 결혼해, 너가 잘지냈으면 좋겠어." 인생에 새로운 삶을 맞이할 그녀의 소식에 안도했다. 하지만 나였다면이라는 생각에 표현할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과 생각들이 뒤섞여 올라왔다. 수년을 만났던 우리다. 우리는 사랑했고 함께했던 나날들은 아름다웠다. 그 나날들은 어느샌가 모르게 지나가버려 돌이킬수 없는 그리움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오직 그날들의 우리였기에 가장 아름다웠을 것이다. 오늘 오후 다시 한번 템즈강변을 거닐어야겠다




지난 연애를 끝낸지 정확히 4개월이 지났다.

뜨거웠던 6월 초여름 나는 그 사람과의 약 2년간의 연애를 정리했다.

2년간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아침을 함께하고 하루를 마무리했던 사이였지만, 

이별은 생각보다 덤덤했고 쉬었던 것 같다.

"헤어지자"라는 말이 머리보다 빠르게 내 입에서 나왔고 그 사람은 몇일을 붙잡았지만 

나는 되돌이키지는 않았다. 

이유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그저 싫었으니까 그 연애가.


내가 헤어지자 말한게, 우리가 이별을 맞이한게 단순한 이유 한가지 때문은 아니였다. 

내가 이별을 고하기 직전까지도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이 애뜻해했고, 사랑했으니까.

오늘 드라마 "연애의 발견"을 보다 그 이유 중 하나를 문득 알게되었다.

나는 더이상 그 사람에게 져줄 수 없게 되버린 것이었다. 



드라마 속 성준과 정유미의 관계처럼, 우리의 연애는 평등하지 않았다.

종종 그 사람의 잘못으로 싸울때면 분한마음, 억울한 마음 속으로 삭히고, 

오히려 내가 잘못했다 말했고, 

참 바보같게도 그 사람이 나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났을때 조차 제대로 따지지 못하고 넘어갔으니까. 


왜 그랬었을까?

내가 그 사람을 더 많이 좋아했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사람한테 져주지 않으면 헤어지게 될걸 알았으니까, 

나에게 그 사람과의 세상이 끝나는게 너무나 무서웠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나는 언제나 져줄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그 사람은 나를 덜 사랑했으니 내 맘을 무기로 매번 이길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을 매일 더 사랑했지만 그 이상으로 불안감은 더 커졌다.

사소한 표정, 목소리의 변화에도 안절부절 못하게 되버렸고 

오히려 함께있던 매 순간이 너무나도 불편하고 곤욕스럽게 되버렸다.

언젠가 이 사람이 나를 더 좋아하겠지, 

그때가되면 지금 내가 힘든 것들 전부 보상받을 수 있겠지 

그런 맘으로 열심히 버텨보려했다. 

하지만 버텨도 버텨도 그 사람은 그대로였고, 

결국 바뀌어 버린 것은 나 자신뿐이였다. 


우리가 사정상 잠시 떨어져 있게 되었을 때 그 사람과 함께하면서 얻었던 모든 불안감, 

불편함이 사라져버렸다. 

그때 깨달았다. 

그 사람과의 관계가, 우리의 연애가 내게는 더이상 이어나갈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내게 있어 이 관계는 터무니 없이 무거워져 버렸다는 것을.

더이상 내가 더 사랑한다는 이유로 약자가 되어야하고, 

억울해야하고, 

분해야하는게 너무 지긋지긋해져 버렸다.


헤어지잔 말을 입에서 꺼냈을때도 나는 분명히 그 사람을 사랑했다.

하지만 내가 더이상 불안해하며 참기에는 관계 자체에 대해 스스로 많이 지쳐버렸다. 


연애가 공평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둘중 하나가 더 좋아할 수 밖에 없고, 당연히 더 좋아하는 사람이 져줄 수 밖에 없다.

그런 사실에 억울한 마음은 없다.

다만, 내가 그 사람이었다면 자신이 많이 사랑받음에 감사하고 겸손했을것이다. 

내 다음 연애는 분명히 과거의 연애와는 다를 것이다.

상대방에게 져주기만하지는 않을거고 바보처럼 참지만은 않을테니까.

물론 그전에 상대방을 이기려고 들지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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